명나라(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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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 12) 삼번의 난과 배신자 말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는 항복한 명나라 장수들의 역할이 컸다. 청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이들에게 각지의 총독 순무 등의 자리를 나눠주었다. 특히 공이 큰 오삼계는 운남성, 경중명은 복건성, 상가희는 광동성의 번왕으로 임명했다. 번왕은 온갖 특혜가 보장되는 작위였다.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데다,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되고, 세습까지 가능했다. 오삼계 등 번왕들은 영지에서 세력을 더 키워 나갔다. 직할 병력과 세수 지역을 마음대로 넓히고, 주변 성들의 인사까지 개입했다. 대륙 정복 초기에는 청나라 조정이 이를 참아넘겼다. 절대다수인 한족에게 만주족의 지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번왕 등 한족 협력자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새로운 황제가 된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21.08.30 -
명청교체 10) 명나라의 허무한 최후
기근과 수탈이 가중되면서 명나라 전역에 농민들의 반란이 들끓었다. 봉급이 끊긴 지방의 병사들은 굶다 못해 탈영해 반란군에 가담했다. 명나라 조정은 반란을 겨우 진압해갈 뿐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만주족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그나마 부족한 재정을 국경 방어에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농민 반란군 가운데 이자성의 세력이 점점 커졌다. 이자성은 집안이 몰락하고 자신이 일하던 역관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다. 이자성은 다른 반란군과 달랐다. ‘백성을 구하자’는 명분을 내세워 관청에서 빼앗은 곡식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자신을 의적으로 선전한 것이다. 이자성은 반란군 두목이 되고도 졸병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어 부하들의 신망을 ..
2021.08.28 -
명청교체 9) 충신을 버려 망국을 재촉하다
문맹이며 정사에 관심이 없어 목수일만 하던 명나라 천계제가 1627년 사망했다.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진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천계제는 숨지기 전 이복동생 숭정제에게 “너는 나보다 재능이 많으니 나라를 잘 다스릴 거다”라면서 제위를 물려줬다. 숭정제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그보다 부지런했던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힘으로 돌이키기에는 명나라의 국운이 너무 기울었다. 그는 즉위 초에 환관 위충현 일당을 제거해 조정의 기강을 다잡았다. 솔선수범해 국고를 아끼고, 그래도 재정이 부족하자 세금을 올리며 “내 백성들에게 1년만 폐를 끼치겠다”고 호소하는 겸허함도 갖췄다. 후금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
2021.08.27 -
명청교체 8) 영원성을 지킨 마지막 영웅
웅정필을 죽이고 나니 국경을 지킬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하급관리였던 원숭환이 단신으로 후금 진영을 염탐하고 돌아와 그들의 사정을 보고했다. 그는 문관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각종 병법에 능통했다. 명나라 조정은 원숭환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은화 20만 냥을 주고 산해관 밖을 지키게 했다. 그는 산해관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영원을 방어거점으로 정하고 새로 성을 쌓았다. 마침 이때 서광계가 완고한 조정을 설득해 포르투갈 홍이포(紅夷砲) 30문을 들여와 11문을 산해관에, 19문은 북경성에 설치했다. 원숭환은 산해관 홍이포 중 일부를 영원성으로 옮기고 화포 전문가를 불러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그런데 새로운 요동경략으로 고제라는 자가 임명됐다. 고제는 병력이 산개해 있으면 각..
2021.08.26 -
명청교체 6) 만주를 적신 조선인의 피
광해군은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인 도원수에 강홍립을 임명했다. 그는 문관이지만 군사 부문 관직을 여럿 거쳤고 무엇보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광해군의 세차 책봉은 받아온 경력이 있어 광해군이 신뢰했다. 조선의 신하들은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막상 후금 원정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강홍립도 병을 이유로 도원수 직을 사양하고 억지로 임명된 뒤에도 사임 의사를 밝혔다. 광해군은 요양한 뒤 떠나라며 강권했다. 전국에서 차출된 병사들은 포수와 사수가 각 3,500명이고 살수가 3,000명이었다. 그런데 명나라군 유정이 포수의 숫자가 적다고 닦달해 1,500명을 증원하여 총 11,500명의 지원군이 꾸려졌다. 광해군은 강홍립이 출정하기 전 ‘관형향배 (觀形向背), 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라)’..
2021.08.24 -
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2021.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