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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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중국을 침략하다
송나라에 왕안석이 있었다면 베트남에는 리트엉끼엣(李常傑)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응우옌뚜언이다.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17살 때 기병 장교로 임관한 뒤 승진을 거듭해 국왕경호대장이 되었다. 뛰어난 용맹과 지략과 충성심을 겸비한 그는 왕실의 성(姓)을 하사받아 리트엉끼엣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모든 조정 신료들로부터도 깊은 신뢰를 받았다. 성종(聖宗)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자 대비가 섭정을 했지만 국가의 주요 정책은 리트엉끼엣이 사실상 모두 결정했다.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에 보내놓았던 첩자들로부터 광서성 성도인 옹주(邕州)를 비롯해 중국 국경도시들에 병력과 물자가 집결하는 등 수상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송의 침략이 예정된 것이라면..
2021.06.01 -
서툴렀던 응오(吳) 왕조
해방의 환희가 잦아든 뒤 찾아온 베트남의 현실은 꿈꾸어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응오꾸엔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율령들을 잇달아 공포했다. 그러나 문무관직과 각종 의식, 관리들의 복제까지 중국 것을 거의 모방하다시피 했다. 정치적 예속은 극복했지만 스스로 통치체제를 정립할 역량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불완전한 국가 통합과 이로 인한 혼란이었다. 중국의 분열을 틈타 베트남 각지에서 세력을 키워온 군벌들은 어제까지 동료 장군이었던 응오꾸엔에게 존경심을 보일지언정 왕조에 충성하는 것에는 주저했다. 군벌들은 응오 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각자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왕권을 위협했다. 비엣족 거주지 밖의 소수민족들은 사실상 독립 상태로 중앙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불과 ..
2021.05.21 -
베트남 민족은 왜 사라지지 않았나
베트남이 무려 천 년 동안이나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도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끝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대 베트남 정책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역대 중국 왕조는 베트남을 남방의 진귀한 산물의 공급원이자 동남아시아 무역 중계지라는 전략적 가치로 보았지 베트남인들을 교화시켜 통합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무역 중심지가 베트남 홍강 하류에서 지금의 중국 광저우로 옮겨가자 베트남을 주변 민족의 중국 공격을 막는 완충지대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중국 측 사가들은 베트남인의 무력저항들을 현지 관리의 무능과 정책의 미비로 인한 일시적 사건이었던 것으로 치부했다. 예를 들어 쯩 자매의 봉기를 ‘이상한 베트남 여자의 반란’으로 치부하는 식이었다. 중국에서 파견된 태수들..
2021.05.20 -
영웅들 독립을 꿈꾸다
중국 최남부인 청해주의 절도사 유엄이 후양 황제에게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했다. 그러자 유엄은 스스로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남한(南漢)이라 정했다. 남한은 지금의 중국 광동성과 광서성에 걸친 한반도 면적의 약 두 배쯤 되는 지역을 차지해 당시 중국을 할거했던 여러 국가들 중에는 비교적 약체였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위협적인 존재여서 쿡씨 정권은 중국 화북의 후양과 관계를 강화하며 남한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호시탐탐 베트남 침략을 노리던 남한의 유엄 황제는 후양 왕조가 후당으로 교체되며 중원이 혼란에 휩싸이자 이를 기회로 보고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남한군은 일거에 쿡씨 정권을 격파하고 그 수장을 압송했다. 남한의 베트남 점령은 일 년여에 그치고 말았다. 쿡씨 정권의 장군이었던 즈엉딩응에(楊廷..
2021.05.18 -
당나라 쇠퇴와 독립의 여명
베트남에게는 고통의 기간이었지만, 당나라는 중국 역사의 황금기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다. 당은 중앙아시아까지 넓힌 영토와 모든 민족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 유럽까지 이어지는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융성한 문학과 예술을 향유했다. 특히 6대 황제 현종은 정치세력 간 균형을 이루고, 민생안정을 꾀하며, 병역제도를 정비해 대외 원정에 성공하는 등 ‘개원의 치’라 부르는 중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종이 말년에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면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대란을 초래했다. 이후 당나라에서는 지방 절도사 세력이 황실을 옥죄고 궁정에서는 환관들이 발호해 황제를 세우거나 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문란한 정치는 토지 겸병을 불러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분노를 모..
2021.05.18 -
압도적 전력 한나라군
쯩짝의 열정과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국제정세가 너무 나빴다. 쯩짝이 거병했을 때 중국은 이제 막 내전을 수습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 국력이 극성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쯩짝이 상대해야 할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는 정치와 군사 모든 면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기원 전후에 한나라가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혼란스러워지자 재상 왕망이 천자에게 양위를 강요해 신(新)나라를 세웠고, 왕망의 비현실적인 이상정치에 반발해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한나라 왕족인 유수(劉秀)가 곤양 전투에서 포위된 성을 홀로 빠져 나와 소수의 원군을 모은 뒤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대담한 작전으로 왕망의 40만 대군을 와해시켰다. 유수는..
2021.05.13